우리가 흔히 중세유럽을 말하면 이웃님들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예 엄격한 신본주의(神本主義) 사회가 떠오르시는 분들이 꽤 되실 겁니다. 신이 서양의 중세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사람이나 모든 것에 우선해 종교가 존재했고, 유럽의 거의 모든 것을 신이 아니 신의 대리인을 빙자한 사람들이 지배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과학 분야에서도 신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내용은 아예 보지 않았고, 보아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것보다 논리와 증거가 중요한 재판에서는 어땠을까요? 재판에서도 앞의 예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신의 정의가 구체화 된 것이라고 여긴 중세 유럽의 법에서는 심판자 역시 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을 신명재판(神明裁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세 유럽은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 지방 분권형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다는 것은 국가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을 독점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 또한 국가가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주가 되었든 기사가 되었든 그 누구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무도 중세에 현대의 경찰이 하는 일을 하는 관리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실 겁니다. 중세 유럽은 동시대의 동양에 비해 월등히 비문명적이었습니다. 적어도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개인과 개인 간 또는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을 그들 사이의 보복에 맡겨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나서 그 중재와 재판을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유럽에서는 이런 야만적인 재판 방법은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이는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의 형성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권력이 집중되면 그로부터 강한 힘이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을 강하게 지배할 수 있고, 이 모든 사항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 말은 지방 귀족이나 호족들의 권력이 비대하면 비대할수록 국가(왕)에게 반란을 일으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국가(왕)는 중앙집권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국가권력의 통제권이 약할수록 지방 호족이나 귀족 등의 개별적인 권리 행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셨다면 신명재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채실 것입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일정한 규칙 아래 신의 심판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선전포고라는 나름 신사적인 전쟁 개시 방법도 이 규칙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폭력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신의 이름 아래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방식은 개인 수준의 재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증거법정주의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절대적인 신의 심판만이 유무죄를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신의 정의를 확인했을까요?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⓵뜨거운 물이 끓는 솥 안에서 맨손으로 돌이나 반지를 건져내게 하였습니다. 이때 손을 다치지 않은 자가 재판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⓶뜨거운 쇠를 맨손으로 들고 일정한 거리를 걷거나 땅에 깔아 놓은 아홉 개의 쟁기 위를 맨발로 걷게 하였습니다. 이때도 다치지 않은 자가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⓷재판의 양 당사자들을 양손을 묶어 물속에 넣는데 이때 물에 가라앉은 자가 이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깨끗한 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가 없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⓸제비를 뽑아 유무죄를 가렸습니다.
⓹마른 빵을 한 번에 먹였습니다. 짐작하시는대로 이때 체하지 않고 먹는 자가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⓺원고와 피고를 십자가 앞에 세우고 양팔을 수평으로 들게 합니다. 이때 먼저 팔을 내리는 자가 지는 것이었습니다.
⓻살인 용의자를 피해자의 관 옆에 세웁니다. 이때 피해자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면 관 옆에 세워진 그는 틀림없는 범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기준에선 정말 황당한 이런 신명재판은 교회 안에서 신부들이 입회한 가운데서 행해지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믿지 못할 일입니다. 중세 유럽의 신명재판 가운데 영화 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결투인데, 이는 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자나 농노같이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자들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결투를 대행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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