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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이 영화 OST라고요?

by 삼둥이 아빠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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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을 부르는 송소희 씨(사진출처:위키백과)

 

 
우리나라 사람이면 영유아를 제외하고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들어보고 한 번이라도 흥얼거렸을 법한 우리 민족의 애창곡 “아리랑”입니다, 유튜브 등에서도 이 아리랑을 멋지게 불러 가사의 뜻도 모르는 외국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그럼 이 아리랑은 언제부터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같은 다른 아리랑과는 전혀 다른 이 “경기아리랑”이라고 불리는 노래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이 노래가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OST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20세기에 발명되고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장르입니다. 이러한 영화는 20세기 대중예술의 총아답게 조선에도 영화는 바로 도입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일반 대중에게 영화가 상영된 것은 1903~1905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이때 상영된 작품이 영화인지 활동사진인지 알 수 없지만, 1906년 이후 여러 영화관들이 생기면서 영화 관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만든 최초의 영화는 1919년 "의리적 구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의 바통을 이어 20년대에는 "장화홍련전", "운영전" 등 주로 고전작품이 영화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 마침내 “아리랑”이라는 우리 영화 최대의 미스터리가 나왔습니다.
 

영화 "의리적 구토" 신문 광고(사진출처:위키백과)

 
“아리랑”을 만든 사람은 나운규입니다. 10대 시절에 3.1운동에 참가했던 나운규는 만주 등지를 유랑하다 독립군 활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감옥에서 나온 후 20대의 젊은 나이에 영화계에 뛰어들어 단역배우에서 일약 주연배우로 성장하였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아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습니다.
 
1926년 10월 1일, 이제는 전설이 된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미쳐 버린 영진은 걸핏하면 일본 경찰이나 그 앞잡이들에게 낫을 휘두르곤 한다.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는 여동생 영희뿐인데, 영진의 친구 현구와 영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 밀정 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고 덤비자, 현구가 기호와 격투를 벌인다. 영진이 곧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살인의 충격으로 정신이 돌아왔지만 살인죄로 체포되는 영진. 그는 슬퍼하는 마을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끌려간다. 그리고 흐르는 아리랑....
 

야마니양행'아리랑'일본어전단 출처 : 뉴스톱(https://www.newstof.com)

 
개봉 당시 “아리랑”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극찬이었습니다. 1926년 12월 18일 <1926년도 영화계를 보내며>라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이렇게 칭찬을 합니다.  "올해 나온 조선 영화 중 제일 나은 것은 아리랑...(중략)... 올해 영화계에서 가장 기쁜 일은 나운규가 아리랑에서 보여 준 기교"라는 찬양에 가까운 기사를 내었습니다. 이렇게 “아리랑”은 일제시대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 주제가는 한국인의 대표 노래가 되었습니다.
 
 나운규는 “아리랑”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쳐 30년대까지 한국의 대표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28년 개봉한 “사랑을 찾아서”에서 간도로 떠나는 실향민을 그렸다가 검열에 걸려 일부가 삭제당하고 나운규도 잡혀갈 뻔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제 검열과 흥행성, 민족성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로 어떻게든 영화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무절제한 생활 탓에 1937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고인이 되고 맙니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9일자에 실린 "아리랑"의 한장면 출처 : 뉴스톱(https://www.newstof.com)

 
물론  영화  “아리랑”을 '항일영화' 혹은 '민족영화'로 규정하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존재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일제의 검열이나 상영 금지를 당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일제 말기에는 징용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가 일부러 이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문화의 특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중문화는 창작자의 의도 못지않게 대중들의 수용 태도도 중요합니다. 예를들어 홍난파가 작곡한 노래 <봉선화>의 경우를 보면 홍난파가 별다른 의도 없이 작곡한(상류층 파티용 연주곡이었다고도 합니다) <봉선화>는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 때문에 홍난파는 일제에 감시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 포스팅한 가수 김추자씨의 노래 <거짓말이야>도 전혀 그런 뜻이 없었지만,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이 지레 겁을 먹고 금지곡으로 지정을 해버리자 노래를 한 번이라도 들었던 국민들은 이 노래를 정치적인 노래로 해석을 했습니다. 친일노래였던 <선구자>는 오히려 독립군을 표현하는 노래가 되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김추자 "거짓말이야"(사진출처:이투데이)

 
하여간 만들어진지 거의 100년이 되어가는 이 영화가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그의 영화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품을 보지 못한 채 관련 기록만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盲人摸象)과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 “아리랑”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리랑' 노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OST가 민족의 영원한 애창곡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민중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혹시 필요하신 광고 있으시면 구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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