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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례준칙의 제정 이유가 이것이었다고요?

by 삼둥이 아빠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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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 선포 이후 본격적으로 국민 생활 및 정신 개조에 나섰습니다. 그 출발이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공포였다고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가정의례준칙'은 가정의례에 있어서 허례허식을 없애고 그 의식 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 기풍을 진작하기 위한 법으로, 이미 1969년에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을 시행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아, 1973년에는 벌칙 조항까지 신설하여 더욱 강력하게 강제한 법을 공포하였습니다.

 

가정의례 준칙 선포 2주년 기념식(사진출처:오픈 아카이브)

 

이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의 주요 내용은, 청첩장 및 부고장 금지, 약혼식 및 함잡이 금지, 답례품 금지, 화환 및 유사 기념물 금지, 굴건제복(상복) 및 만장 금지, 음식 및 술 대접 금지 등이었습니다. 사실상 결혼식 및 장례식과 관련하여 비용이 들어가는 대부분의 의식 행위들이 금지시킨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홍보영상입니다.

 

https://youtu.be/Vc8knYIHUrE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스몰웨딩이 유행하는 현재 시각에서 보면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50여년 전이라면 어떨까요?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정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자칭 보수의 정권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박정희 정권은 왜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법을 만들고 시행했을까요?

 

사실 박정희 정부에서는 ”가정의례준칙“을 시행한 배경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시대 국가에서 주도한 경제성장은 심각한 정경유착과 냄새나는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양산했고,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습니다. 고도의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이들의 상실감이 팽배한 가운데 졸부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성대한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러 위화감을 조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권력자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어 청탁을 하는 것도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였습니다.

 

사진출처:서울신문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부작용을 인정하는 대신 일반 국민들의 잘못된 인식이 문제라고 전체를 싸잡아 비판했습니다. 기존의 관혼상제가 "허례허식"이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합리적인 신제도가 필요하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단속 대상이 모호하여 힘없는 사람들만 위축되고,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과소비형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에 정부는 더 강력한 법률을 만들었지만, 이 또한 어차피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허울이었습니다. 당장 이 법이 공포된 다음 해인 1974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의 장례식이 엄청나게 호화롭게 치러졌습니다. 대통령도 아니고 대통령 부인이 죽었는데 나라 전체가 거액을 들여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가정의례준칙이라는 법 정신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육영수 여사가 정부의 행사 중에 영부인이라는 이유로 흉탄을 맞아 죽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면 국장(國章)이었습니다.

 

육영수 여사 장례식(사진출처:서울기록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정의례준칙“이 과거 일제가 했던 우리 전통 관습 폐지 노력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다시 하나하나 생기는 지방축제를 보면 지방자치체들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여러가지 축제를 만들었지만 지역 특색과 상관없이 결국은 야시장이라고 모두 비슷하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이에 "왜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마츠리'나 브라질의 '카니발' 같이 체계화된  축제가 없는 것일까?"하는 한탄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다른 나라의 지방축제는 그 뿌리가 종교 행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카니발은 기독교의 사순절과 관련된 사육제에서 시작한 것이고, 마츠리는 일본 신사의 축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전통 축제도 대부분 민간 신앙이나 불교 행사와 연관되어 있는데, 일제는 이것을 미신적 행위라고 무조건 금지시켰습니다. 조상신 숭배는 일본 신도나 우리 무속이나 매한가지인데 왜 우리 축제만 금지시켰을까요? 그 이유는 축제가 공동체의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1919년 5일장에서 조선 민중들이 만세를 불렀던 3·1절을 생각하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열린 만세시위 모습(사진출처:한겨레)

 

정당하지 못하고 숨기는 것이 많은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민중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들이 모이는 행사 중 가장 큰 것은 축제와 결혼식, 장례식입니다. 축제와 의식이 성대할수록 많은 민중이 모이고, 민중들이 일단 모이면 정권에 대한 불평불만이 나오고 그 불평불만은 언제라도 저항의 물결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니 축제는 미신으로, 결혼식과 장례식은 허례허식으로 몰아 폐지하고 축소하려 한 것입니다. 정말 허례허식을 추방하고 싶었다면 고위직 공무원과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조촐한 관혼상제를 치르도록 계도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사회적인 모범이 돼서 국민들에게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국민 계몽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의식 개조 사업에 나선 것은, 허례허식 폐지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종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사진(사진출처:나무위키)

 

급속한 경제 성장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권의 노력(?) 덕분에 우리 사회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파편화가 되었고,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개인주의가 만연하다고 한탄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전통의 문화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복원을 해 나아간다면 예전과 같은 공동체 의식이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은 "에피소드로 보는 유신의 추억"을 참고하여 적었습니다.

 

사진출처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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