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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우파"의 어원은 무엇일까?

by 삼둥이 아빠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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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를 비롯해서 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좌파와 우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휴전 중인 국가인데 왜 “남과 북”이나 “상 혹은 하”의 단어를 쓰지를 않고 “좌와 우”를 사용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Pixabay 로부터 입수된 ooceey님의 이미지 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현대 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은 급진파 또는 진보파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우파'라는 말은 보수파 등과 마찬가지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럼 좌파, 우파라는 말이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그것은 바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그 시작으로 합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도화선으로 민중봉기였던 프랑스혁명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기 2개월 전쯤에 소집된 삼부회는 신분제 의회였었지만 스스로를 제헌 의회로 선언하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그리하여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하지만 국왕을 폐위시키지는 않았으며 혁명이 끝난 1791년 제정된 헌법에서도 국왕의 지위는 입헌군주제라는 제도로 인정되었습니다. 만약 루이 16세가 새롭게 만들어진 헌법하에서의 입헌 군주라는 지위에 만족했다면 프랑스혁명의 방향은 바뀌었을 겁니다.

 

그러나 절대 군주의 지위를 신이 허락한 자신의 가문에 부여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루이 16세에게 입헌 군주란 말도 안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러한 루이 16세를 도와주려 했습니다. 절대왕정의 정부들이 자신들의 나라에도 이러한 제도들이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루이 16세는 몰래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했습니다. 그러나 1792년 변장을 한 채 왕비를 비롯한 가족을 데리고 파리를 빠져나간 루이 16세는 도중에 어느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 파리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사진출처 : 니무위키

 

파리로 돌아온 루이16세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그 끝을 모르게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문제는 루이 16세의 문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간섭 전쟁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닥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준비가 거의 없었던 프랑스 군대는 잇달아 패배하고 맙니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입법 의회의 호소에 전 국민이 호응하여 전국에서 의용군이 속속 파리로 몰려들었습니다.

 

민중들은 절대왕조를 인정하는 세력의 계속되는 승리 뒤에는 내부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국왕을 체포하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과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혁명적 군중과 의용군 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비를 붙잡았고, 의회는 왕권의 정지를 선언합니다.

이 사이에 프로이센 군대는 국경을 넘었고 9월 파리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발미까지 육박했다. 조국을 지키려는 의용군들은 이 발미 전투(9.20) 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입법 의회 대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국민공회는 왕권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정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선포합니다.

 

사진출처 : 한국독서진흥연구회

 

당시 국민공회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그것이며 거기에 더해 중간에 유동적인 중도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민공회 회의에서 지롱드 파는 오른쪽에 있는 좌석에 앉았고 자코뱅 파는 왼쪽에 앉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각각 우파 좌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둘 다 공화주의자들이었으나 지롱드파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변했고 지방분권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당의 노선으로 잡았습니다. 한편 자코뱅 파는 지르드파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소시민층과 민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민중의 복지와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통제 경제도 불사해야 한다는 당시에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 목표를 달리하는 두 정파는 국왕 처리 문제로 치열하게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지롱드파는 가능하면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최소한 사형은 면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자코뱅 파는 이에 반대를 하였고요.

 

사진출처 : 중앙일보

 

국민공회는 1792년 12월 11일 국왕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모든 의원들이 국왕이 유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에 처하는 것만은 반대하는 의원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하는 자코뱅 파는 혁명의 안전을 위해 조국과 국민을 배반한 국왕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1793년 1월 16일 사형이 결정되었다. 표결 결과는 사형 찬성 387표, 반대 334표였습니다. 투표의 결과대로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도 같은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 보수적으로 원래 있었던 사회적 관습 등을 지키며 점진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쪽을 우파 혹은 보수파라고 하고, 과거의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더라도 빨리 사회적 개혁을 이루려는 세력을 좌파 혹은 진보파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이 좌파를 공산주의자들로만 매도해 버리는 곳은 드뭅니다. 정치권은 더 이상 국민들을 좌와 우로 갈라 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Pixabay 로부터 입수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입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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