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카이사르와 함께 서양의 3대 정복자로 알려져 있는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군대는 위(胃)를 가지고 싸운다." 그만큼 군대에 있어서 군수품 특히 식량은 굉장히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장군 중에 이를 무시했던 한 사람에 의해 일본의 패전이 앞당겨진 사실을 아시나요?
1944년 3월 8일에서 7월 3일 이 시기에 일본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인도의 마니푸르와 나갈랜드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인도의 임팔이라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임팔전투“ 혹은 ”임팔작전“이라고 불리우는 전투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작전의 준비기간이 긴 편이어서 전술적인 준비와 무기를 잘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영국군의 행군방향과 공격시기 등 여러 정보를 면밀히 포착해 허를 찌르는 기동전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성공률이 상당히 높은 작전이었습니다.
전투의 초기에서는 일본은 항상 그랬듯이 영국군에게 우위를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이겨 전선이 길어질수록 일본군은 군수품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의 일본군 책임자였던 무타구치 렌야는 전장의 주무대가 정글이라는 것을 너무 믿으면서 너무 간과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이때 무타구치 렌야가 식량의 조달을 걱정하는 부하 장교에게 한 말로 정리됩니다. "일본인은 채식을 해왔으니 정글에 들어가서도 풀만 뜯어 먹을 수 있으면 보급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러한 기상천외한 말을 한 무타구치 렌야는 정글이라는 장소가 식물이 많은 곳이기에 현장에서 채취하여 그것을 식량으로 먹으면 된다고 너무 쉽게 생각읋 한 것이지요. 덕분에 일본군은 최소한 3만 명이 넘는 자국 군사들을 굶겨 죽이고 전쟁을 실패하였습니다.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 아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수많은 전쟁사가 증명하듯 정석 중의 정석이지만, 동시에 이것만으로 보급을 운용하라는 말은 그 어느 병법서나 실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옛날 적 보급 약탈의 달인이었던 고구려나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노획을 밥 먹듯이 성공시키던 몽골군마저 농사나 목축을 통한 안정적인 보급 확보 없이는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데체 렌야는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요? 1941년 12월, 무타구치 렌야는 지트라 전투의 사단장으로 참여하였고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55일 만에 무너지게 됐는데, 여기에서 일본군은 처칠레이션이라고 하여 영국군의 보급품을 노획하여 사용을 했는데 이 것이 렌야가 가지는 자신감의 근본이 됩니다. 이 자신감을 가지고 정신력만을 운운하며 일본군을 지휘하던 렌야는 끝끝내 작전에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작전으로 인해 많은 일본군이 굶어죽게 되어 단일인으로서 일본에게 가장 큰 손해를 입힌 렌야는 일본 본토에서 패전을 맞이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A급 전범들 대부분이 전범 재판을 거쳐 사형 등의 선고를 받았으나 렌야는 A급 전범으로 기소가 되었으면서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리 되었습니다.
렌야가 불기소 처리된 결정적인 이유 중 1942년 4월 무타구치가 말레이 방면을 공략하던 18 사단장이었을 때 벌어진 알렉산드라 야전병원 학살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의 18사단은 영국군의 야전병원을 점령하고, 소수의 포로만 남기고 환자 및 스태프를 학살했는데 다음날 현장을 방문한 무타구치가 생존한 영국군 고위 장교 포로에게 사과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야마시타 대장이 나중에 부하들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전범이 되어 처형된 것과는 달리, 무타구치의 경우에는 당시 영국군이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 일본군에 저항했던 까닭에 기소하기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과 함께 증인을 찾기 위해 무타구치의 사진을 영국에 보냈으나 1년이 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점이 고려되어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렌야는 앞에서 이야기한 "일본인은 채식을 해왔으니 정글에 들어가서도 풀만 뜯어 먹을 수 있으면 보급은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말 외에도 많은 기상천외한 행동을 했습니다. 임팔작전이 한창일 때에도 저녁 5시만 되면 퇴근을 하여 작전사령부 옆에 설치한 기생집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니 현재의 일본 극우세력들도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와 함께 3대오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임팔전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도 참여를 했습니다. 주로 심리전을 전담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 김상준, 나동국, 박영진, 송철, 김성호, 이동수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명칭은 '인도 - 버마 전선의 공작부대'라는 의미인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이었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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