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SBS에서 한석규, 장혁, 신세경, 조진웅 씨등이 열연을 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기억하시나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과정에 액션과 스릴러를 가미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장소적 배경이 되는 곳 중 “반촌(泮村)”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 반촌이라는 곳은 성균관에 속해있던 곳이었습니다.
먼저 성균관은 고려시대에 시작된 조선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습니다. 고려시대인 986년 “태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1298년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옮겨 왔습니다. 이때 성균관의 각종 허드렛일을 맡았던 300명의 노비들도 같이 옮겨 왔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성균관 주변에 모여 살았습니다. 성균관의 별칭이 반궁이었기 때문에 성균관 동편과 서편에 만들어진 마을을 '반촌'이라고 불렸습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숙종 연간의 성균관 입역노비는 340호 2,000∼4,000여 명 정도였고, 반인의 인구증가로 반촌은 점차 커져서, 정부에서도 반촌 동쪽의 사섬시(司贍寺) 공터를 제공하는 등 조처를 취하였다고 합니다.
반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반인'이라고 불리웠습니다. 1398년(태조7) 성균관 건물이 처음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반촌은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다 태종 때에 전답 1,000여 묘(畝)와 노비 300명이 성균관에 하사되었는데, 이 노비들은 이미 고려의 성균관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분명 노비였지만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성균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반인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일단 이들이 살고 있는 반촌은 순라군(밤에 궁궐과 장안 안팎을 순찰하던 군졸)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의금부의 속해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만약 도둑을 잡는다.고 들어가서 소란을 피우면 오히려 처벌받았다고 합니다.
반촌의 특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반촌 사람들 중 일부는 소고기를 도축해서 파는 현방 혹은 다림방으로 불리우는 정육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사업이었던 조선에서는 소의 도살을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성균관에서 지내는 제사에 사용할 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반인들에게 도축하도록 하고, 남은 고기는 판매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소고기 수요량이 늘자 조정에서는 반인들에게 소를 도축하고 고기를 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냥 독점판매권을 준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공급량을 조절하는 한편 성균관의 운영 재원으로 충당했습니다.
반촌 사람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성균관 유생들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 중 일부가 반촌에서 하숙하며 지내기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되면 반인이 운영하는 현방 영업을 물심양면으로 돕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정조 11년인 1787년에는 반회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반촌에 있는 김석대의 집에서 성균관 유생 정약용과 강이원 등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 이승훈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가 발각된 것입니다. 당시 계급질서를 기본으로 하고, 조상 및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성리학과 반대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천주교를 탄압하던 사회적 분위기에선 발각이 되면 멸문지화를 당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험한 모임을 가진 장소가 반촌이었다는 사실은 성균관 유생과 반인들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했는지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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