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에게 “일왕”이란는 존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1989년 히로히토가 위독했을 때 일본인들은 1억의 일본 국민 모두가 일왕이 나을 때까지 근신하자는 '1억 총 자숙'을 실행하고 신문들은 날마다 그의 혈압, 맥박 등을 전하는 고정란을 설치하여 이것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습니다.

물론 왕가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환타지를 제공합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도 왕가가 유지가 되는데 왕가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됩니다. 그렇지만 영국인들과는 다르게 일본인들은 '그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일왕 혈통'을 자랑하며 일왕에 대한 일종의 신앙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일왕의 위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일왕은 그 존재만으로도 일부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과 배외주의적 기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큰 혼란에 처하게 되거나 19세기말처럼 외국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 오거나 일부 정치 세력이 필요에 의해 이런 상황을 조작해 내는 때가 온다면 일왕이 일본 사회의 불평을 잠재우고 통합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과 180년 전만 해도 일본인들 대부분이 일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왕은 11세기 무사들이 가마쿠라(倉)에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한 번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습니다. 정치적 실권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7세기 초 정권을 잡은 뒤로 무사정권이 확고히 안정되자 일왕은 그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왕가의 연수입은 쌀 3만 석이었습니다. 당시 도쿠가와가(德川家)의 장군의 연수입이 700만석이었고 10만 석이 넘는 번(막부의 통제를 받던 지방정권)들도 꽤 있었습니다. 일왕은 일개 번의 수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규모로 궁핍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생계를 위해 황가의 보물을 교토의 시장에 내다 파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태를 막부는 보기만 했고 대신 행여 왕실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는 가차 없는 보복을 가했습니다. 그렇기에 대외적인 명분이 필요했던 일부 무사들 이외에 농민을 비롯한 일본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일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영주만 의식하면 되었습니다.

이랬던 일왕이 민중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1840년 중국의 아편 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였습니다. 동양의 영원한 강국일거라 생각했던 중국이 영국에게 패했다는 청천벽력을 접한 일본의 정부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때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한번 패했던 일본은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자기 고유의 것, 일왕을 새삼스레 들춰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시 막부 전복을 꾀하던 일부 하층 사무라이들은 거사의 명분을 갖기 위해 일왕을 이용했습니다. 훗날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은 일왕을 '다마(玉)'라는 암호로 부르며 일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던 교토를 연일 드나들었습니다. 이들에게 일왕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했습니다. 효명(孝明) 일왕(명치 일왕 직전의 일왕)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 데 반대하자 하층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 직전에 그를 독살시켜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공작에 의해 어느덧 일왕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일왕의 이름으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일본인들에게 일왕은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정권을 막부에게서 탈취한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거의 유일한 권력 기반인 일왕의 존재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나이 어린 메이지(明治) 일왕에게 전국 각지를 순행하게 하고 곳곳에서 일왕의 군대 사열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1873년 메이지 일왕은 한때 무사정권의 본거지였던 가마쿠라의 순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일왕은 4월 1일 아침 도쿄 신바시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가마가와 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오후에 가마쿠라에 도착 후, 여기서 상직적인 퍼포먼스로 무사들의 무기 독점을 폐지하고 징병제로 새로 구성한 일왕의 육군의 야영 연습을 참관하고 한 어촌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정부가 파견한 밀정은 이때 백성들이 일왕 방문에 대해 “감복해하기는커녕 귀찮아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일왕이 방문한다니까 지방 관서에서는 도로, 교량 보수에 주민들을 동원했고 일왕 일행의 음식 등도 주민부담으로 마련했습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빠듯한데 수백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일왕에 대해 어민들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에 난 구덩이를 메우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제대로 메우지 않고 짚단으로만 살짝 가리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 중 한 사람은 "일왕님이 오신다고 이전의 길을 고치고 청소했다. 일왕님의 행차는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라고 말했다고 밀정은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퍼레이드에 동원된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몇몇 마을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마중 나온 자들도 뻣뻣이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예를 갖출 생각을 하지 않는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민중의 반응에 신정부의 실권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무사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왕실의 각종 행사를 부활시켜 성대하게 치렀고 전국의 국민학교에 일왕의 사진을 배포, 교실마다 걸어 놓게 했습니다.
이어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크게 장려하여 일왕을 신격화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를 정리해 국가의 감독하에 두는 국가신도정책을 수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일본의 첫 의회가 개설되던 1890년에는 마침내 국가적인 일왕 이데올로기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칙어(敎育勅語)>가 공포되고 전국의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암송하게끔 했습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가 되면 농민의 자식인 젊은 군인들이 대형 중국국기 위에서 중국에 대한 '대일본제국의 성스러운 전쟁'을 개시할 것을 촉구하면서 '일왕의 이름'으로 하라키리 (할복)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도쿠카와 막부 말기 젊은 무사들의 배를 갈랐던 '일왕의 이름'이 20세기에 와서는 농민 아들들의 배를 가르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패전 25년이 지난 1970년에도 일본에선 유명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역시 '일왕의 이름'으로 일본 정신의 부활을 외치며 배를 갈라 죽었습니다. 이렇게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일왕의 이름'은 현대일본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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