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칭기스 칸을 기억하시나요? 잘 아시다시피 몽골을 통일한 후 세계정복을 꿈꾸어 유럽을 단 8만 명의 몽골 기병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 시켰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간단히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면,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 데 비해 칭기스 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지만 그가 9세 되던 해 오복 키야트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진 (칭기스 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 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칭기스 칸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어 몽골 통일 및 유럽을 공격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지만,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포로였기에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기존의 기득권층에 맞서기 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테무친의 이런 행동을 알게 된 부족과 씨족의 부족장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습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잔인하지만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테무친의 군대는 자무카의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해 버렸습니다. 결국 자무카는 패주 하는 도중 부하의 배반으로 칭기즈 칸에게 붙잡혀 사형당한다. 1206년 그는 마침내 쿠릴타이 (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 에서 칭기스 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정복자가 됩니다.
이후 칭기스 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합니다. 원래는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획되었으나 칭기스 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유랑을 기본으로 하여 한족들에게 무시를 받던 몽골의 아니 칭기스 칸 군대의 가공할 만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첫째, 그의 군대는 평민으로 구성된 것을 그 이유로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구성원의 계층때문이 아니라 이전 몽골족의 군대 조직과는 전혀 다른 조직 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부족을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칸(유목민의 군주 칭호)의 명령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로 편제되었습니다. 이에 효과는 각 부족장들의 권한은 약화되고 칸으로의 중앙집권이 이뤄졌습니다. 칭기스 칸은 지휘관을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하여 무능하면 그 자리는 즉시 부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실제 당시 몽골군의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둘째, 칭기스 칸은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습니다. 특히 개방적인 종교정책을 취함으로써 많은 종교가 존재하던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의 대부분인 불교도인 곳을 정벌할 때에 칭기스 칸은 권력층과는 달리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던 민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칭기스 칸은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몽골군의 승리만이 자신들 사업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 한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교역을 하며 얻은 각 민족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기스 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칭기스 칸은 또 이들의 입을 통해 몽골군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퍼트림으로 상대국이 싸우기도 전에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몽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평민 군대의 탄생이 테무친을 몽고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칭기스 칸의 개인적인 능력과 당시 국제적인 상인 조직의 뒷받침이 결합되어 역대급의 정복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칭기스 칸은 1227년 8월에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정확히 확인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죽자 몽고군 지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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