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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원래 위장약이었다고요?

by 삼둥이 아빠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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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님들은 술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누가 뭐라하여도 소주입니다. 언제부턴가 와인과 막걸리의 인기가 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주를 따라잡기에는 아직 힘이 딸립니다. 우리의 전통술이던 청주도 소주에 밀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게사나 차례를 지내고 마시는 술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Pixabay 로부터 입수된 EarthTrip님의 이미지 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기쁜 마음을 축하해주던 소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고유의 음식이 아닌, 한반도를 침략했던 몽골인들이 전해준 것입니다. 13세기 초, 1백 년 가까이 무신들의 득세로 인해 갖가지 부정부패로 쇠약해진 고려는 새로이 등장한 몽골제국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워낙 말을 잘타고 중앙 아시아 대륙을 누비던 몽골의 군사는 순식간에 고려의 전 국토를 휩쓸었고,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백성들까지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맞섰지만, 수십 년에 걸친 몽골군의 무시무시한 침략을 막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거기에다 나라의 안위를 책임져야하는 고려의 정부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강화도로 도망쳐버립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결국 40년에 걸친 고려의 대몽항쟁은 실권을 쥔 무신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고려 왕실이 몽골에 왕자를 보내 강화를 맺음으로써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삼별초를 위시한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은 몽골과 한편이 된 고려 조정에 반대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고려를 복속시킨 몽골은 한반도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까지 넘보게 됩니다. 남송까지 점령한 몽골의 쿠빌라이(원 세조)는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 해상 원정을 시도했습니다. 이때 원나라 군사들이 고려에 장기간 주둔했는데, 경상북도 안동제주도가 그들의 기지였습니다. 그 당시 안동에 주둔한 몽골 군사들이 마시던 독한 술이 어느새 고려 백성들에 게까지 전해졌고, 그것이 소주입니다.

 

사진출처 : 안동소주

 

그럼 소주는 몽골에서 개발되어진 술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몽골 소주의 원류는 1240년 무렵 몽골군이 멀리 페르시아까지 정복하면서 얻은 전리품 중 하나가 도수 높은 증류주였던 아라크(Arag)였습니다. 본래 아라크는 페르시아에서 위장약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 었다고 합니다. 물론 술을 종교적인 이유로 금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어떻게 술이 나왔느냐고 의구심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도 공개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다 뿐이지 암암리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존재했습니다. 그 증거로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아바스 왕조의 최고 통치자인 칼리프를 모시는 사람들 중에는 '칼리프의 술 상대'란 직책을 가진 비서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 조선일보 미디어

 

몽골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아라크도 전파되었습니다.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중국과 멀리는 동남 아시아에까지 아라크가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몽골군이 주둔하던 안동에서는 특산물로 안동소주가 생겨나게 됩니다. 고려인들은 처음에는 도수가 높아 소주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이내 독한 맛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고려 말 김진이라는 장수는 평소에도 소주를 즐겨 마셔는데 어느 정도였냐 하면 왜구가 쳐들어왔는데도 너무 취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문책을 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소주를 너무 좋아하다가 신세를 망친 것이죠. 그런가 하면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는 아버지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관하여 벼슬을 버리고 밤낮없이 소주만 마시다 죽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소주는 기분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 마셨나 봅니다.

 

소주는 정권이 고려이든 조선이든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오히려 더 유행을 하여 조선 성종 때에는 부자들만이 아니라 양민들의 잔칫상에도 오를 정도로 보편화 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위장병 증세에 시달릴 때마다 소주를 마셨다고 합니다. 독한 술기운으로 고통을 덜려고 했던 것이죠. 또 숙종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는 뜻에서 왕실 호위대인 금군과 훈련도 감의 군사들에게 소주와 청주를 50병씩 상으로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소주는 제사에도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세균들이 왕성하게 활동해 도수가 낮은 청주는 쉽게 상하는 반면, 도수가 높은 소주는 잘 상하지 않아 특히 여름철 제사상에 자주 올랐습니다. 율곡 이이도 이 점을 강조하며 여름철에는 청주 대신 소주를 제사상에 올리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SBS 뉴스

 

조선 왕조 내내 사랑받던 소주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박정희 정권 때로 접어들면서 뜻하지 않은 탄압(?)을 받게 됩니다. 1963년 정부는 양곡관리법을 근거로 쌀로 술을 빚거나 쌀로 만든 술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막걸리나 청주, 소주의 원료를 쌀 대신 값싼 밀가루나 고구마로 교체하고 여기에 아스파탐 같은 단맛이 나는 화학 물질을 넣어 만들게 한 것입니다. 식량인 쌀을 아낀다는 명분이었는데 그 바람에 쌀과 누룩으로 빚어오던 우리의 전통주 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게 됩니다.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몰래 예전 방식대로 술을 빚던 일명 밀주를 제조하던 양민들은 관청의 조사원이 나오면 황급히 술 단지를 숨기곤 했습니다. 운이 나빠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술 단지와 누룩을 모두 빼앗기고, 관청에 끌려가 곤욕을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소주를 마시면 숙취가 심해졌습니다. 양곡관리법에 의해 화학물질을 술에 혼합을 하면서 이 화학물질이 많을수록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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