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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이 영국인을 위한 음식이었다고요?

by 삼둥이 아빠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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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네 개봉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기억하시나요? 최민식, 하정우, 김성균, 조진웅 등의 배우들이 열연을 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장면 중 하정우 씨가 중국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먹은 음식 중 탕수육이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집을 가족이나 지인들끼리 가면 짜장면, 짬뽕만 먹기에는 웬지 아쉬울 때 같이 주문을 해 먹는 음식 중 대표적인 요리입니다. 요즘에는 중국집에서도 셋트메뉴로 해서 2인이 먹어도 부담없는 양을 같이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즐겨먹는 탕수육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요? 여기에는 전쟁의 역사가 함께 합니다.

 

Pixabay 로부터 입수된 Exodus님의 이미지 입니다.

 

19세기 영국은 청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했습니다. 청은 영국에 차와 도자기, 그리고 비단 등을 영국에 팔았고, 영국은 모직물을 주로 청에 팔았습니다. 하지만 영구인들은 청의 물건들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많이 사갔지만, 청의 국민들은 모직물 같은 옷감은 하층민들이나 입는 옷에 쓰이는 물건이라 경멸을 하였기에 청과 영국의 무역은 영국이 계속해서 적자를 입는 기형적인 구조로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이에 영국은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청에 은밀히 아편을 팔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편이 삽시간에 중국을 접수해 청의 조정에서는 자신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은 주지않고 오히려 국력을 약화시키는 이 아편에 대해 벼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1816년부터는 영국이 본격적으로 아편을 청에 팔기 시작까지 하였습니다.

 

이 아편의 폐해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한 번 아편을 맛본 청나라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아편을 사서 밤낮 가리지 않고 피워댔습니다. 농민이나 장인(기술자), 노동자, 기생 같은 하층민들은 물론이고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나 중책을 맡은 정부 관리들도 아편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원에서 수행을 해야 할 승려들도 염불을 하기보다 아편을 더 많이 피웠고, 심지어 황제인 도광제 본인도 아편에 손을 댔을 정도로 중국은 말 그대로 '아편쟁이들'의 소굴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인 조나단 스펜 Jonathan Spence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에 성인 남성 중 약 10분의 1이 아편을 피웠다니, 당시 아편 중독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 중앙일보

 

이에 청의 도광제는 임칙서를 발탁해 아편을 근절시키려 했습니다. 동생이 아편 때문에 죽어 아편을 극도로 증오했던 임칙서는 즉시 임지인 광저우로 내려가 광둥(廣東)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외국 상인들에게 정식 포고문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외국 상인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내놓고 다시는 중국에 아편을 들여오지 말 것이며 이런 내용을 문서로도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엄포도 놓았습니다. 처음에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의지를 가볍고 보고 아편 1천여 상자만을 내놓았다. 이를 본 임칙서는 "저들이 얕은 수작을 부려 계속 아편을 팔려고 하는구나!" 하며 격노했 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이 1816년 이후 중국에 들여온 아편을 모두 합치면 약 8만 상자에 달하였는데 임칙서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양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임칙서는 먼저 영국 상인들이 머무르는 지역을 포위하고 음식과 물 공급을 끊었습니다.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영국 상인들은 이틀 동안 버티다 결국 가지고 있던 아편 대부분인 2만 상자를 내놓았고, 임칙서는 이 아편 상자들을 해안 가에서 모두 녹인 다음 바다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영국상인들은 다시는 아편을 중국에 들여오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지않고 마카오로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 때 술취한 영국명사가 중국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임칙서는 군대를 이끌고 마카오로 가 봉쇄를 해 버립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1890년 영국과 청은 우리가 아편전쟁이라 불리우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영국을 우습게 보았던 청의 군대는 영국군에게 무참하게 패했고, 2차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홍콩은 약150년 동안 영국의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영국이 이기고 전쟁은 끝났지만 또다른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이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자 장사를 통해 한몫 단단히 잡아보려는 영국인들로 홍콩, 광저우 등지는 붐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튼 기쁨도 잠시, 영국인들은 먹는 문제로 불편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중국인들이 무서워 주로 배 나 영국인 상관에서 지내던 터라 미리 가져온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중국에 발을 딛고 살면서는 자연히 중국인이 대접하는 음식들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구부터 불편했습니다. 포크나 숟가락에 익숙한 영국인들로서는 길쭉한 나무 막대기(젓가락)를 써서 음식을 집어 들어 올리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영국인 들은 슬슬 불만이 쌓였고, 이 문제를 중국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기에 이릅니다.

 

사진출처 : KBS뉴스

 

이에 중국인들은 영국의 무시무시한 힘을 체험했기에 영국인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심 끝에 중국인들은 영국인들 입맛에 맞고 서툰 젓가락질로도 잘 집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육식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식성을 고려해서 넉넉히 공 급할 수 있는 돼지고기를 선택했고, 이 돼지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 간장. 생강·후추 따위로 간을 하고, 적당히 간이 배면 고기에 달걀흰자 푼 것과 녹말가루 푼 물을 넣어 버무린 후 튀겨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소스를 부었는데, 소스는 녹말 가루를 푼 물에 설탕·간장·소금 등으로 간을 하고 버섯·당 근·오이 등 볶아 놓은 채소와 식초를 넣어 함께 끓여 만들어 '달고 신맛이 나는 고기'라는 뜻으로 이 음식을 탕수육(糖醋肉)이라고 정했습니다.

 

탕수육을 대접받은 영국인들은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 기막힌 맛도 맛이려니와 무엇보다 힘들게 젓가락질을 하지 않고 포크를 쓰듯 그냥 대충 찍기만 해도 쉽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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