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진주에서 이학찬이라는 사람이 아들을 진주 제3야학교에 입학시키려다 학교의 학부모뿐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까지 거부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학찬의 아들의 입학을 거절당한 사유는 바로 이학찬이의 직업이 백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저항하는 백정들의 평등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으로 이어졌습니다.
백정(白丁)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에 있었던 계층에 대한 호칭입니다.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던 소위 도축업자로서 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인 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에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조선 세종 이후 백정이 다른 뜻으로 바뀌고 나서도 도축업자가 백정일 수는 있었지만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었으며 백정이 아닌 양인 도축업자도 있었으니 모든 도축업자가 백정도 아니었습니다.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으며 백정은 도축업 이외에도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 의미의 단어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직업군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혈통 혹은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인식이 낮아 실질적인 차별은 컸고 1894년 갑오개혁 때 백정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였습니다. 하지만 관습적 차별은 여전히 남아, 그들과 결혼하는 것, 이웃으로 사는 것, 친구로 사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들어 이러한 관습적 차별이 오히려 제도적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일제는 호적에 백정임을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고 학교에 입학할 때 신분을 밝히도록 하는 등 백정 격리 정책을 제도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이학찬 사건이 백정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에 진주의 많은 백정들이 모여 '형평사(衡平社)'라는 운동 단체를 만들고 백정 차별 폐지와 평등한 대우를 주장하는 형평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형(衡)'은 양팔저울을 뜻합니다. 양팔저울의 양쪽이 수평을 이루어 무게를 재는 것처럼, 세상도 균형을 이루어야 제대로 굴러간다는 의미였습니다.
진주에서 일어난 차별 반대운동은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적극 동조하였고, 일제 억압에 분노한 일반인들을 비롯하여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 여성, 노동자, 도시 빈민 등 이 연대하여 일어났습니다. 백정들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같이 살고, 모욕하지 말라는 아주 당연한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백정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29년 3월 21일 밀양에서 형평사원 김일도가 양반 김판쇠에게 모욕을 당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고기 자르는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김일도가 감히 백정 주제에 양반에게 맞선다고 깔아뭉개면서 예전에 사라진 양반의 권위를 누려 보려다가 당한 일이었습니다.
1933년 8월 28일 광주 송정리에서는 형평사원 조조원이 3년 동안 사귄 애인 박복례가 이별을 통보하며 백정이라고 모욕하자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박복례가 감히 백정이 자신을 결혼 상대로 여겼다고 화를 내자 홧김에 벌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정에 대한 차별의식은 몰락 양반, 여성, 소작 농민 같은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의 울분을 백정에게 풀며 더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형평사는 이러한 근본 원인이 일제 지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약자들의 연대가 절실했습니다. 형평운동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약자들의 저항운동과 연대하여 일제와 투쟁하면서 더 힘을 얻었습니다. “연대하여 억압의 사슬을 끊는 것!” 형평운동은 소수자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형평운동이 힘을 얻자 일제는 지도부를 회유하는 한편, 강력한 탄압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적 약자들은 탄압으로 입는 피해가 일반인들보다 더 크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소수자 운동은 다수의 관심에서 잊히기도 쉽습니다. 활동이 어려워지자 형평사의 일부가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와의 타협은 백정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형평운동을 어렵게 했고, 결국 1930년대가 되면서 형평사도 해체되고 형평운동도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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